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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 큰딸 선희가 서울에서 문안 드립니다.

가을도 이제 다 여물어 갑니다. 날씨며 안부를 여쭐 겨를도 없이 세월이 참말로 빠르게 흘러가버렸어요. 올해는 송원도 곡식이 잘 여물었갔지요? 감자며 옥수수를 잘 거둬들여서 식구들끼리 푸지게 나누어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은 가을볕이 조금 따갑기는 한데, 그늘에만 앉으면 찬기운이 훌쩍 몸을 파고듭니다. 새벽이면 이따금 안개가 잔뜩 깔려서 눈앞이 부연 것이 정히 계절이 변하기는 변한 모양입니다. 오늘 어무이와 운동장에 나와 보니, 철봉이며 미끄럼틀에 아침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반짝거리더군요. 송원은 서리가 벌써 내려앉았갔지요? 어무이 손 붙잡고 남녘으로 내려온 지도 어언 20년이 다 돼 가는데, 고향에서 온 식구가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밥 먹던 기억이며, 돌담에 쌓아 둔 짚단 같은 것들이 이제는 하나도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나저나 기쁜 소식이 있어요. 아바이 딸 선희가 지난달부터 우체국에서 전보電報 치는 일을 맡게 되었답니다. 올봄에 타자 학원에 등록해 타자수 훈련을 받은 경험이 크게 써먹혔지 뭐예요. 이 전보라는 게 말이에요. 속도도 속도지만 무엇보다 틀려서는 안 된답니다. 남들보다 먼저 세상 소식을 듣는 일은 그럭저럭 반가울 일입니다만, 이북 관련 전보를 쳐야 할 때는 좀처럼 긴장을 놓을 수가 없어요. 어느 지역에서 간첩이 잡혔다느니, 누가 이적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소식이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두 손이 굳어버리는 마음을 아바이는 아시겠어요?

오늘은 효창운동장에서 실향민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부터 개성, 개풍, 평강, 김화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 오랜만에 장마당 생각을 했어요. 노인들은 돗자리를 깔고 막걸리를 들이키며 고향 소식을 나누었고, 나는 부녀회 아줌마들이랑 큰 공 굴리기 종목에 나섰어요. 왜 있잖아요. 오오다마 코로가시大玉転がし. 종이로 만든 커다란 공 말이에요. 생각보다 공이 가벼워서 두 사람이 굴리려니 어디로 튀어 나가는지도 모르겠더군요. 큰 공이 맥없이 굴러다니니 선수들끼리 부딪히고 넘어지고 참말로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답니다. 비싼 옷이 먼지투성이가 된 줄도 모르고 오랜만에 모처럼 진을 다 뺐어요. 아바이도 같이 왔으면 야, 야! 힘 좀 쓰라우. 공이 막 나가버리지 않간? 잔소리를 거들었을 텐데 말이에요.

아바이, 어무이가 운동회 내내 고향 생각을 많이 하셨어요. 아바이, 우리가 언제면 다시 만나 같은 편을 먹고 그 공을 한번 굴려볼 날이 올까요?

아바이, 그날까지 몸 성히 계셔요.
다음엔 더 기쁜 소식으로 편지 쓰겠습니다.

운동회가 끝난 저녁,
남쪽에서 큰딸 선희가.
2025
2025. santanchoi@gmail.com ⓒ2025 by Lijung & Jeongwon Shin. Project by Lijung, Text by Jeongwon Shin